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폰소 13세 (문단 편집) === 친정 기간 === [[1902년]]에 16세가 돼서야 겨우 친정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알폰소 13세는 자신의 권위를 마음껏 누렸다. 선거를 계속하면서 보수당과 자유당이 번갈아 내각을 구성하는 체제를 지켰지만, 내각을 교체하려는 목적에서 의회에 간섭함으로써 정치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해졌다. 즉위 이후 1923년까지 내각이 33번이나 바뀌었고, [[의회]]는 계속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았으며 알폰소 13세에 대한 지지도 떨어졌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인 [[빅토리아 유지니|바텐베르크의 빅토리아 유지니]][*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바텐베르크의 공자 루트비히|바텐베르크의 루트비히 공자]]의 남동생)와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메리 빅토리아 페오도라|베아트리스 공주]]의 고명딸이다. 불행히도 빅토리아 여왕의 혈우병 인자도 상속받았다. 그래서 웃기게도 양가에서 이 결혼을 우려했는데 정작 그걸 무시하고 결혼을 강행한 알폰소 13세는 자식들의 혈우병 때문에 아내를 비난했다.]와 결혼하던 날 끔찍한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그에 대한 암살시도가 계속되었지만 알폰소 13세는 그때마다 슬기로운 행동으로 위기를 극복하였다. || [[파일:에드워드 7세 장례식 참석 군주들 사진.jpg|width=100%]] || || [[에드워드 7세]]의 장례식에서. 뒷줄 왼쪽부터 [[노르웨이 국왕]] [[호콘 7세]], [[불가리아 왕국|불가리아]] [[차르]] [[페르디난트 1세(불가리아)|페르디난트 1세]],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2세]], [[독일 제국|독일]] [[카이저|황제]] [[빌헬름 2세]], [[그리스 왕국|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 그리고 맨 오른쪽이 [[벨기에인의 왕]] [[알베르 1세]], 앞줄은 '''알폰소 13세 본인'''. [[영국 국왕]] [[조지 5세]], [[덴마크 국왕]] [[프레데리크 8세]]. || [[1909년]]에 있었던 안토니오 마우라 내각의 붕괴로 스페인의 의회제도가 흔들리는 조짐을 보였고 알폰소 13세의 입지도 매우 위험해졌다. 알폰소 13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동안 용의주도하게 [[중립]]을 지키고 인도주의를 내세우면서 많은 활동을 함으로써 비난을 면했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의회를 없앨 방법을 찾으면서 자신의 독재체제를 세우려고 했다. [[1921년]] [[리프 전쟁]]에 직접 개입했으나 대패함으로써 뒤이어 설치된 조사위원회로부터 정면으로 비난받았으나 이 위원회가 보고서를 발표하기 1주일 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덕분에 굴욕적인 상황을 겨우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폰소 13세는 의회제도를 없애는 것에 합세하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독재자가 되도록 함으로써 스페인 왕실 및 왕위의 존립 자체가 매우 위험해졌다. 카탈루냐에서 자치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노동]] 운동까지 같이 일어났다. ||[[파일:29C18AAC-0A92-43A2-8011-5348B25ED98A.jpg|width=100%]] [[파일:9540ED65-C6B5-40DE-BCD2-2DFBBE4CB2FA.jpg|width=100%]]|| || 알폰소 13세와 리베라 장군 || [[1928년]]에는 그라나다에 파라도르 호텔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